독후감

헤게모니 쟁취에 이데올로기 역할

김경훈 2021. 10. 4. 18:25

그람시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면 모순이 격화되어 자동적으로(필연적으로) 혁명이 발발할 거라는 좌파들의 기대가 전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영국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사실만 봐도 그랬다. 더구나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다른 서유럽 국가에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뛰어난 혁명가가 으레 그러하듯, 그람시 역시 마르크스주의에 교조적으로 매달리지 않았다. 대신에 현실을 통해 이론을 다시 궁리했다. 이토록 착취당하는데 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지 않을까? 지배자들의 탄압이 두려워서? 모든 지배 집단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본격화하면 가혹하게 진압하기 마련이다. 러시아나 다른 나라나 이 점에서 별 차이는 없었다. 그런데 러시아 인민은 혁명으로 나아갔고 다른 나라 인민은 그러지 않았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그람시는 기존에 존재하던 지배와 저항의 방정식에 뭔가 다른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배 집단이 언제나 강압적인 폭력만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점, 요식 행위라 할지라도 피지배 집단의 동의과정을 거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것은 노새에게 채찍을 휘두르다가 가끔 당근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피지배자 스스로가 지배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동의에 기반한 지배 체제, 그람시 특유의 헤게모니개념은 그렇게 탄생한다.

지배자의 정당성과 피지배자의 동의가 핵심 사안으로 떠올랐다는 것은 곧, 의식이나 이데올로기 또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함을 의미했다. 물론 최종적 문제, 바꿔야 할 현실이 경제임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람시는 계급적 이해를 인식하는 단계에서 이미 이데올로기가 인식의 틀로 작동해 버린다는 점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착취와 불평등의 현실 그 자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어떻게 그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차별적 제도가 존재함에도 차별이라는 인식 자체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면 제도 개선은커녕 문제 제기나 공론화조차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람시가 문화 같은 비물질적요소를 물적 토대만큼, 때로 그 이상으로 강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